시요일과 함께하는 시詩 처방전 06
사연
이* 님
저는 요즘 용기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용기를 내야 하는 순간마다 머뭇거리게 되고 결국엔 아무것도 못하게 됩니다. 새해니까, 하는 핑계로 용기 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면서도 막상 닥치면 무력해지는 저를 볼 때마다 무거운 공기덩어리를 목으로 삼켜내는 기분을 느낍니다. 볼과 귀가 붉어져서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 순간을 떠올리고 후회하면서 용기를 미루지 말아야지 다짐합니다. 용기를 내야 하는 순간에 주저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처방시
씨앗
함민복
씨앗 하나
손바닥에 올려놓으면
포동포동 부끄럽다
씨앗 하나의 단호함
씨앗 한톨의 폭발성
씨앗은 작지만
씨앗의 씨앗인 희망은 커
아직 뜨거운 내 손바닥도
껍질로 받아주는
씨앗은 우주를 이해한
마음 한점
마음껏 키운 살
버려
우주가 다 살이 되는구나
저처럼
나의 씨앗이 죽음임 깨달으면
죽지 않겠구나
우주의 중심에도 설 수 있겠구나
씨앗을 먹고 살면서도
씨앗을 보지 못했었구나
씨앗 너는 마침표가 아니라
모든 문의 문이었구나
처방전
용기의 씨앗
김현(시인)
독자님의 사연을 읽으며 곰곰 생각에 잠겼습니다. 한 사람이 용기에 관하여 생각하는 것은 어떤 순간일까. 한 사람이 그때 용기를 냈어야 했다고 후회하는 마음이란 어떤 마음일까. 저도 용기가 필요했던 순간에, 제가 용기를 내서 이루었거나 용기를 내지 못해 이루지 못한 순간이 차례대로 머릿속에 그려졌습니다. 다양하고 넓었습니다, 용기의 영역은요.
피로에 눌려 약속한 시간에 원고를 보내지 않고 잠들어버린 것이나(편집부 여러분 물의를 일으켜서 죄송합니다) 감기몸살이 심한데도 병원에 가지 않고 버틴 일(짝꿍에게 미련하다는 잔소리를 들었습니다), 직장동료들과 감히 1박2일로 여행을 다녀온 일은, 용감한 일이었습니다. 용감하지 못한 일도 있습니다. 지난주말에 조금만 더 용감했다면 안전한 이불에서 나와 쓰레기 분리수거와 빨래를 했을 겁니다. 이런 것도 용기가 필요한 일인가, 이런 것도 용기의 영역에 포함해야 하는 건가 싶겠죠. 그러니까, 용기는 참 개인적인 영역인가 봅니다.
저는 용기가 부족한 사람입니다. 저는 때때로 불의에 맞서는 것이 두렵습니다. 아무리 용기를 내도 목소리는 떨리고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도 하고요, 맞설 때보다 맞서고 난 뒤 입게 될 타격 같은 것들이 먼저 떠올라서 부러 피해버리고 맙니다. 애석하게도 그렇게 산 세월이 길어서 저는 이제 그런 성정을 지닌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저는 용기 있는 사람 곁에 서길 멀리하지 않는 사람이며, 불의의 맞서는 사람의 편이 되는 일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의 뒤라면 반드시 그 뒤를 지키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용기의 범위에 들어와 있는 사람입니다. 직진하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 있고 우회하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 있으며, 제자리걸음을 오래한 뒤에야 한발을 내딛는 용기를 가진 사람도 있고 단번에 성큼성큼 뛰어가는 용기를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혼자서도 우뚝 서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 있고 여럿이서 바닥에 눕는 용기를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최근 우리는 그 어느때보다 용감한 여성들의 목소리를 동시에 듣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용기는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그 용기의 기원을 떠올리면 부드러운 과육에 둘러싸인 단단한 씨앗이 그려지곤 합니다. 마침표가 아니라 문이요. 그 문을 열기 위해, 그 문을 열 용기를 가지기 위해 그 사람들은 얼마나 많이 주저했을까요. 그런 걸 생각하면 용기를 내기 위한 주저는 용기 밖의 일이 아니라 용기 안의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이미 용기의 씨앗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씨앗을 품고 있는 사람만이 빨개지는 귓불을 가지고 고개를 숙일 줄 알고 주먹을 꼭 쥘 줄도 압니다.
언젠가 어느 자리에서 자신의 애칭을 ‘풀’이라고 소개하던 이가 있었습니다. 그날 그이는 사람들에게 작은 비밀을 하나 털어놓았습니다. 비밀을 여는 것은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인가요! 그 사랑의 비밀을, 아주 환하게 웃으며 말하는 한 사람의 모습이 참 용기 있어 보였습니다. 여러분들한테만 특별히 말한 거예요,라며 이야기를 마치던 그이 덕분에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이 모두 힘 있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은 안 비밀. 그러고 보면 용기를 내는 일이란 또한 사람을 살리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 이제 용기가 좀 나시죠?
2018.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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