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고 싶어라...
- 빈센트 반고흐, 그리고 커즈(kaws)

이소영(아트메신저)

어릴 때 내 별명은 울보였다. 누가 놀려도 울고, 슬퍼도 울고, 화나도 울고, 심지어 좋아도 울었다. 나는 모든 감정 방정식의 답이 결국 눈물 하나로 통하는 그런 아이였다. 집안 어른들은 그럴 때마다 근심을 표했다. 잘 우는 아이가 있으면 집안이 망한다는 것이 어른들이 믿는 오랜 철칙이었다. 그래서 나는 울 때마다 자주 화장실로, 작은방으로, 할머니의 옷장으로 잠깐씩 자주 감금되었다. 나를 겁주려는 벌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건 분명 아동폭력인데 말이다. 아쉽게도 이 감금은 나를 더 울게 만들었고, 급기야는 초등학생 시절 학교 대표로 고음 파트 대장이 되어 동요대회에 나가는 행운을 주었다. 그때는 내가 목청이 완전히 트인 판소리의 대가라도 될 줄 알았다. 잠깐 잘하는 것은 재능도 취미도 아니었다. 꾸준히 오래 잘하는 것이 진짜 재능과 취미인 것이다. 노래보다 미술을 더 좋아한 나는 미대에 갔고 이렇게 그림을 소개하는 글을 쓰고 있다.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네덜란드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의 작품 중에서는 우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것이 몇 있는데, 그중 내가 애착을 가지는 그림은 ‘우는 노인’ 시리즈다. 시리즈라고 하는 이유는 한 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친 노인, 1882, 종이에 연필, 반고흐 미술관
울고 있는 노인, 1890, 캔버스에 유화 80x64cm, 크륄러 뮐러 미술관

다 큰 어른이 두 손을 꽉 움켜쥔 채 얼굴을 가리고 엉엉 운다. 그림에 스피커가 달려 있다면 아마도 노인의 울음소리에 우리는 아무도 그의 옆에 다가가지 못하고 숨죽일 것이다. 무슨 일을 겪었기에 그는 이렇게 울고 있단 말인가. 소리 없이 타오르는 난로만 그의 옆에 있을 뿐이다. 그런데 참 신기하다. 그가 운 것이 한번은 아닌 듯하다. 고흐는 이 그림을 1882년도에도 그렸고 1890년에도 그렸다. 그렇다면 고흐는 이 노인이 우는 것을 8년 후에 또 본 것일까? 사실 이 그림 속 주인공은 헤이그에 사는 ‘아드리아누스 야코부스 자더란드’라는 할아버지다. 그는 고흐가 헤이그에 살던 시절 종종 그의 모델이 되어주었다. 참전 용사였던 그는 전쟁 후유증으로 꽤 오랜 시간을 고생했다고 한다. 고흐는 그를 주인공으로 작품을 그렸는데 훗날 그 기억을 살려 유화로 다시 그린 것이다. 그런데 유화로 그린 시기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그때는 바로 고흐가 세상을 떠나기 몇달 전이다. 그래서 나는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저 울고 있는 노인이 빈센트 반 고흐로 느껴진다.
매일 쉬지 않고 작업하던 나날들, 작업을 할 수 있어 행복하다는 마음과 한편으로는 언제쯤 자신의 작품이 세상에 알려질까? 하는 불안함, 그리고 언젠가 자신의 작품도 알아주는 사람들이 나타나겠지 하는 기대감 속에서도 동생 테오에게 늘 물질적인 도움을 받아야만 했던 미안한 마음… 고흐는 많이 지쳤고, 더이상 앞으로 나가기에 염치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작품을 하고자 하는 열망, 그리고 자신의 재능에 대한 확신으로 고민했을 것이다. 그런 숱한 감정들에 복받쳐 눈물이 홍시처럼 터져버리는 날도 많았을 것이다. 그 눈물의 맛은 서러움, 감사함, 미안함, 불안함, 괴로움이 뒤섞인 세상의 모든 맛일 것이다.

석촌호수 kaws 홀리데이 프로젝트, 2018 ⓒ이소영

그리고 여기 미국의 팝 아티스트 작품이 한 점 더 있다. 미키마우스를 닮은 해골의 눈에 x표가 된 특이한 캐릭터 ‘컴패니언’을 만든 작가 바로 커즈(kaws, 본명은 브라이언 도넬리 1974~)의 작품이다. 지금 잠실 석촌 호수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떠 있는 이 녀석은 사실 아트 토이 시장과 미술 옥션에서 이미 높은 가격을 찍으며 거래된 바 있는 떠오르는 스타다. 그런데 울고 있는 이 녀석의 모습을 보자마자 나는 고흐가 그린 ‘우는 노인’을 떠올렸다. 생각해보니 커즈는 이 캐릭터를 만들면서 컴패니언(companion)에 친구와 동료의 의미도 두었지만 경계의 의미도 심었다. 바로 원작과 모작 사이가 그 경계를 의미한다.

companion - passing through, 2013

장난기 가득하고 매일 행복할 것 같은 이 녀석은 무엇이 그렇게 슬플까? 누군가는 미키마우스를 닮았지만 너무 늙은 해골이라는 사실에 슬퍼하는 것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출근길 버스를 놓친 직장인이라고 하지만 어쨌건 나이가 어리건 많건 삶의 무게가 가볍든지 무겁든지 그 누구에게나 울고 싶은 날은 오고 그 울음의 무게에 한계는 없다.

‘울어 봤자 무엇이 달라지나’

맞다.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래도 울면 어두워진 마음이 목욕하는 기분이 든다. 어른이 된 우리가 울고 싶은 것을 애써 참을 때, 울고 싶은데 장소가 마땅치 않을 때 나는 이 두 예술가의 작품을 본다. 울고 싶을 때는 가끔 울자. 어린아이들처럼… 그것만큼 자유로운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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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출처: www.artnet.com

2018. 8.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