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도 통역이 되나요?
- 토머스 스터버 「인 디 아일」

조해진(소설가)


바야흐로 겨울의 한가운데입니다.
지난번에 도착한 편지, 「겨울 예감―에릭 로메르 「겨울 이야기」, 서울아트시네마, J열 6번」을 읽으며 겨울잠이라는 분야에서만큼은 나도 강성은 시인님에게 지지 않을 텐데, 혼자 중얼거렸답니다. 물론 그 승부는 영원히 판정이 불가능한 강성은 시인과 저의 비밀로 남겠지만요. 겨울에 잠자는 시간이 길어지는 이유는 이 시기에 유독 일이 몰린다거나 피로가 깊어져서는 아닙니다. 저혈압군에 속하긴 하지만 걱정할 만한 수준은 아니고 겨울에만 발병하는 모종의 질병을 앓고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저, 우울할 뿐이에요.

찬바람이 불면 우울이 찾아오는데, 우울감이 지배하는 시기가 대개 그렇듯 의욕 없는 상태가 한동안 이어지는 것입니다. 가을까지는 매일 읽고 쓰자는 원칙을 어떻게든 지키는 편이어서 밖에서 맥주를 마시고 온 날에도 노트북을 켜놓거나 읽던 책을 펼쳐놓은 채 씻고 정리하고 고양이의 식사를 살피는데, 이상하게 11월 말쯤부터는 그렇게 지켜온 일상이 처참할 정도로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늦잠은 기본이고 책을 읽고 원고를 쓰는 일에 좀처럼 몰두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곤 하죠. 아무것도 읽거나 쓰지 않고 지나가는 날들이 쌓여가는 건 물론이고요. 한마디로 행복이나 능률 같은 멋진 단어를 사유하거나 고민할 염치도 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겨울에는 우울감을 다스리는 호르몬으로 알려진 세로토닌이 덜 생성되어서,라는 의학적인 설명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절박하게 동의하지도 못하겠어요. 누구에게나 그런 마음이 있겠지요, 그러니까 모든 감각이 근원적인 회의로 이어지는 우울감이 의학적으로 설명되는 것에 무슨 이유에선지 거부감이나 굴욕감을 느끼는 작은 마음이…….

그런데, 인간의 우울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어느 겨울 저녁에, 의욕 없는 상태에서 간신히 벗어나 옷을 차려입은 뒤 시내에 있는 극장에서 영화 친구인 편집자 N과 「인 디 아일」(토머스 스터버, 2018)을 보면서 저는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습니다. 우울은 외로움에서 오는 것이라고요. 외로움, 시인님은 외로움과 싸워 이긴 적이 있나요? 아니, 인간이 외로움과 싸운다는 것 자체가 가능하기나 한가요?

「인 디 아일」은 대형 슈퍼마켓에 입사한 주인공 크리스티안이 그곳에서 일을 배워가고 사랑을 예감한다는 평범한 줄거리를 따릅니다. 줄거리는 평범하지만, 크리스티안뿐 아니라 그와 사적인 관계를 맺는 브루노와 마리온 역시 비밀 한가지씩을 갖고 있다는 것이 이 영화의 매력입니다. 크리스티안은 지금은 말소된 전과 기록을 숨기고 있고, 선임인 브루노에게는 실체 없는 가상의 아내가 있으며, 크리스티안이 사랑을 느끼는 마리온은 남편의 폭력을 감당하고 있죠. 네, 맞아요, 모두가 외로운 사람들이에요. 그들의 각기 다른 비밀은 저마다의 외로움을 번역한 결과라고, 어두컴컴한 객석에 앉아 저는 생각했습니다. 겹쳐 떠오르는 인물들이 있었는데, 노선이 정해진 버스를 몰면서 발표할 욕심 없이 시를 쓰는 패터슨(「패터슨」, 짐 자무쉬, 2016)과 가상의 친구와 노년의 불안을 공유하는 레오(『사랑의 역사』, 니콜 크라우스, 민음사 2006)였죠, 또한, 삶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조차 생각하지 않고 대신 연말을 함께 보낼 애인을 찾는 사무직 직원 E(『주말, 출근, 산책: 어두움과 비』, 김엄지, 민음사 2015) 같은 인물도 생각이 났습니다.

사실 크리스티안을 보며 시인님을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알람 소리에 일어나 출근길에 오르고 출근한 뒤엔 일정 시간 일해야 하며 퇴근한 뒤엔 귀가하여 잠을 자는 노동자의 일상을 시인님도 피해 갈 수 없을 테니까요. 「인 디 아일」을 함께 본 편집자 N도 마찬가지고요. 알다시피, 저는 정시에 출근해야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서른살 무렵부터 해온 강의도 작년부터 스스로 ‘안식년’을 선언하면서(물론 시간강사에게 안식년은 가상의 아내나 친구 같은 개념이긴 합니다) 쉬고 있는 형편이지요. 「인 디 아일」을 본 뒤로 각자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김현과 N과 나의 외로움은 이 겨울에 어떻게 번역되고 있을까, 생각하곤 했습니다. 일단 시인님은 출근할 곳이 없는 저를 부러워할 것이 분명합니다. 근데 뒤이어 내가 아무리 긴 겨울잠을 자고 일어나도 행복해질 희망을 갖지 못하겠다고 말한다면, 말해버리고 만다면, 시인님은 어떤 표정을 지어 보일까요? 아마도 슬퍼하겠죠. 그러나 단단한 사람이 대개 그렇듯, 슬픔은 짧을 것입니다. 대신 시인님은 말해주지 않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그것이 남겨진 자들의 몫이라고, 세상은 죄 없는 자의 피로 얼룩진 컨베이어벨트의 확대판에 지나지 않고 멀리서 보면 우리 역시 그 컨베이어벨트를 돌아가게 하는 부품일 뿐이지만 대신 우리에게는, 권력도 돈도 없는 소박한 우리에게는, 그것을 관조하고 슬퍼하고 기록할 수 있는 감각과 문장이 있으며 그것이 곧 희망이라고……, 어쩌면 내 슬픔을 잠시 시인님 집에 갖다놓겠다고 할까요? 최근에 시인님은 “우정이란 그의 집에 찾아온 슬픔을 내 집으로 불러들이는” 것이라고 썼으니까요(『당신의 슬픔을 훔칠게요』, 미디어창비 2018). 그 문장이 제게 위안이 되었다는 걸, 이제야 밝힙니다.


추신: 이번 편지에는 존대의 표현을 써봤습니다.
참 이상하죠? 존대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고 마음은 표현되지 못할 때가 많은데, 한낱 어말어미로 존대하는 마음의 유무를 결정하다니요. 제가 문단에서 알게 된 사람들 중에 말을 놓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동갑내기 시인과 소설가 한명씩을 제외한다면 시인님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저는 지금껏 김현 시인만큼은 존대하지 않았다는 얄궂은 오해도 가능한 걸까요. 그런 오해는 퍽 억울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못내 억울해서 이토록 낯간지러운 어법으로 편지를 쓴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편지를 마치며 마지막으로 어머님의 안부를 물어요. 그리고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과 작별한 친구분께 두 손 모아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고생했으니 이제 편히 쉬라고, 어느 바람결에 전해주세요.

2019. 1.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