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의 초상을 그리려면
작은 새와 비파와 01
김성라
제주의 도요 씨께
안녕하세요.
도요 씨, 서울의 비둘기입니다.
도요 씨가 지난 편지에서 제철 과일을 챙겨 먹으라고, 스스로에게 좋은 것을 주라고 했었지요. 그래, 그래야지, 결심해놓고서도 며칠 전 은행 앞에 서 있던 체리 트럭을 그냥 지나쳤어요. 체리 한 줌이 수박 한 통 값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는 각종 공과금, 보험료, 통신비가 빠져나가는 때이기도 했고요.
그렇게 지나쳤던 체리 트럭이 오늘은 횡단보도 맞은편 떡볶이 가게 앞에 서 있었습니다. 트럭 앞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은 며칠 전처럼 고개를 푹 수그리고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어요. 핸드폰 속에 중요한 뉴스가 있는 걸까. 체리를 판매할 마음이 없는 걸까.
그 사람은 아마도 그 일이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수줍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초록불이 켜졌고 검은색 흰색 검은색 흰색 건널목을 살까 말까 살까 말까 고민하면서 건넜습니다. 길을 건너 체리 트럭 앞에 멈추어 서서 가격표를 보았어요.
‘왕 체리 1근(400g) 13,000 → 10,000’
400g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지 않아 “한 근이….” 하고 입을 뗀 순간 고개를 들고 일어난 사람은 빨간 바구니에 체리를 담아 저울에 올려놓았습니다.
에계계.
나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아이코 비싸네 하고 그냥 가버린 일이 흔했는지 체리 트럭 앞의 사람이 나의 표정을 살폈습니다. 마주한 그 사람의 얼굴은 체리 같지 않고 왠지 푸근한 호박 같았습니다. 푸근한 호박 같은, 수줍은 얼굴을 마주하고 무르기엔 늦었다고 생각했어요. 오늘 내 앞에 트럭이 다시 나타난 건 도요 씨의 조언을 실행에 옮길 기회처럼 여겨지기도 했어요.
봉지에 한 줌의 체리가 ‘도로록’ 담겼습니다. 봉지가 까만색 불투명이 아닌 노란색 반투명이라, 반투명 노랑 사이로 작고 검붉고 동그란 것들이 언뜻언뜻 비쳐 보여서 기분이 좋았어요.
초록불 신호등이 다시 켜지고,
나는 검붉고 작고 동그란 제철의 체리 한 줌을 가지게 된 비둘기,
나는 좋은 것을 나에게 주는 비둘기,
노란 봉지를 흔들면서 검은색 흰색 검은색 흰색 횡단보도를 건넜습니다.
덕분에 잘 익은 체리를 맛보고 있는 저녁이에요.
도요 씨도 남쪽의 제철 과일을 드시고 계신지, 정작 도요 씨는 냉동 음식이나 통조림으로 저녁을 해결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돼요.
그럼, 시간 나실 때 소식 전해주세요.
서울의 비둘기가.
* 제목 “작은 새와 비파와”는 가네코 미스즈의 시 「이제 됐니」의 한 부분을 인용하였습니다.
향긋한 바람이
스민 가지에
따스한 햇살이
머문 자리에,
동그랗고 토실한
과일이 달린다.
바람 중에서도
가장 맑은 바람이
햇볕 중에서도
가장 고운 볕살이
한여름내 쌓여 온
과일나무 가지에,
싱그럽고 달콤한
맛이 열린다.
- 김종상 「과일나무」, 창비아동문고 70 『어머니 무명치마』(1985)
2020. 12.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