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면 미안할수록
조해진(소설가)
지난번 편지에서 ‘마음은 동사다’라는 구절을 읽으니 십여 년 전 어떤 소설에 “감정적 차원의 진실이란 한순간에 급조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추억을 헌납하며 조금씩 만들어가는 공유된 약속일 것이다.”라고 썼던 기억이 났어. 그 문장을 쓸 무렵에 난 삼십대 중반이었어. 시간이 흐른 뒤에 읽어도 전적으로 동의하게 되는 과거의 문장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시네마천국」(주세페 토르나토레, 1990)의 토토처럼 텅 빈 객석에 홀로 앉아 나만이 그 비밀을 아는 필름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관객이 된 것만 같은데, 이런 경험은 글을 쓰는 자의 특권이라 불러도 무방하겠지.
그런데, 현아, 너도 알다시피 가끔은 그렇지가 않잖아. 어떤 마음은 그 마음이 실현될 법한 동사와 일치하지 않아서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잖아. 가령 미안한 마음은 ‘들여다보다’나 ‘챙기다’로 연결되어야 할 것 같은데 ‘피하다’라는 동사로 실현될 때가 있지. 가끔은 그렇게 생각해. 혹여 이 불일치가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쓰고 읽고 보게 하는 윤리적인 문제 중에 하나가 아닌가, 하고 말이야.
몇해 전에 본 영화 「한공주」(이수진, 2014)도 그런 질문을 던진 영화 중에 하나였어. 실제 있었던 집단 성폭행 사건을 모티프로 한 「한공주」는 사실 선과 악, 피해자와 가해자가 명백하게 양분된 영화였지. 그런데 이 영화에서 엄청난 잘못을 하고도 그 잘못에 사과하지 않는, 사과는커녕 피해자의 삶을 더 외진 곳으로 몰아가는 뻔뻔한 가해자와 그들의 뻔뻔함을 가능케 하는 제도―경찰과 학교가 정한 온갖 규율―는 나를 분노하게는 할지언정 불편하게 하지는 않았어. 진정 불편한 인물은, 공주가 성폭행당하는 순간이 찍힌 그 문제의 영상을 본 뒤 차가운 얼굴로 노트북을 닫는 ‘은희’였는데, 아마 나뿐 아니라 대부분의 관객이 같은 생각이었을 거야. 외롭고 폐쇄적인 공주에게 손을 내밀어 웃게 해주고 기타를 치게 해주었던 은희가 공주에게서 돌아선 순간, 공주는 이 세계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았다고 느꼈을 거야. 가해자들의 부모들이 학교에 찾아왔을 때보다, 어쩌면 그 비극적인 사건이 있었던 순간보다 더…….
교통사고로 한꺼번에 부모를 잃고 소녀 가장이 되어버린 ‘영주’의 이야기를 담은 「영주」(차성덕, 2017)를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지. 영화에서 영주는 사고뭉치 동생의 합의금을 마련하기 위해 부모를 죽게 한 교통사고 가해자를 찾아가지만 직접적으로 돈을 요구하지는 못하고 그저 그의 두부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는데, 뜻밖에도 그와 그의 아내에게서 가족의 온기를 발견하게 돼. 어느 순간 영주는 그 부부에게 진실을 말해야겠다고 다짐하지. 그것이 관계의 예의라고 생각했을 테고, 또한 자신이 그들을 진심으로 용서한다면 그들과 더 가까워지리라 기대하기도 했을 거야. 하지만 영주가 본인의 정체를 밝혔을 때, 그 진실 앞에서 마음이 편해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가해자의 아내가 남편에게 “너무 미안하고 가엾지만 이제 더 이상 그 애 얼굴을 볼 수 없어.”라고 말하는 걸 몰래 듣게 된 영주는 그제야 현실을 직시하게 되지. 진실이 때로는 가혹하다는 걸, 미안하다는 말이 곧 ‘함께’의 의미는 아니란 것도…….
그런데 우리 중 누가 은희와 그 두부 가게 부부의 외면을 비판할 수 있을까. 그 누가 그들의 반대편에 서서 그 선택을 완벽하게 대상화할 수 있을까. 가까운 사람의 고통을 목격했을 때 외면하거나 움츠러드는 연약한 순간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심지어 그 사람이 평소와 달리 조금 더 외롭고 조금 더 슬퍼 보여도 우리는 뒷걸음칠 때가 있잖아. 현아, 언젠가 너도 쓴 적이 있지, 술 취한 엄마의 전화는 사양이라고(『걱정 말고 다녀와』, 알마 2017). 나도 그래. 나도 부모가 싸우는 날이면 방문을 잠그고 라디오의 볼륨을 높이던 소녀였고, 지금도 ‘니 아버지랑 못 살겠다’ 류의 전화를 받으면 어떻게든 빨리 전화를 끊으려 한다. 그런데 현아, 미안해서 피하는 것이 아무리 이해된대도 그것이 정답은 아닐 거야. 아마, 그렇겠지?
다르덴 형제의 「내일을 위한 시간」(2015)이 떠오른다.
병가를 마친 뒤 복직을 앞둔 산드라는 동료들이 자신의 복직 대신 보너스를 택했다는 소식을 듣고 주말 동안 그들을 찾아가 선택을 철회해달라고 부탁하지. 동료들은 죄책감을 드러내기도 하고 변명도 하면서 저마다의 사정을 이야기하는데, 산드라와 가장 가까웠던 나딘은 산드라를 피하고 결과적으로 가장 큰 상처를 안기게 돼. 산드라는 결국 복직에는 실패하지만 동료들을 만나며 얻은 연대의 감수성을 간직하게 되고, 자신 역시 그 비슷한 문제 앞에 직면했을 때는 타인을 위한 선택을 하지.
인간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는 마음, 그리고 그 마음과 이어지는 ‘피하다’라는 동사는 어쩌면 편한 방식일지도 몰라. 나 역시 삶의 많은 순간에 그 방식을 택했고 현재도 마찬가지지만, 그럼에도 상기하려고 해, 그 방식이 최선은 아니란 것을…….
상상의 법정을 상상할 때가 있어.
사실 일상에서의 윤리적인 문제는 상상의 법정에서만 다루어지는 문제잖아. 무죄나 유죄가 없는, 구속도 형량도 없는, 그래서 무해한, 무해해서 쓸모없을 때도 있는 법정……. 반성이니 고민이니 하는 것, 가끔은 무해하고 쓸모없지만 아직 내 머릿속 한곳에 상상의 법정이 남아 있어서 다행이라고는 생각한다. ‘다행’이라는 마음은, 그리고 ‘걷다’라는 동사로 실현될 때도 있을 거야. 신발이 불편하지만 않다면 언제까지고 나아가는 그 ‘걷다’……. 그러니까 지금은,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친구가 있어서 ‘걷다’하는 5월의 밤이야.
추신:
마음은 동사라는 말뿐 아니라 시인이 허무맹랑하게 다정하다는 말에도 공감합니다.
시인님과 나는 사실 전화도 자주 하지 않고 따로 만나는 일도 드물며 함께 여행을 하거나 서로의 집을 방문한 적은 없죠. 그러나 멀리 있어도, 자주 만나지 못해도, 나를 걱정하는 시인님의 다정이 전해지곤 합니다.
시인님, 나의 다정도 이 편지에 담아요.
2019. 5. 15